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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바빌론" 리뷰(할리우드, 광기, 음악)

by bongba 2025. 3. 26.

영화"바빌론" 관련 사진

‘바빌론(Babylon, 2022)’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연출한 할리우드 초기 영화 산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극이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의 혼란과 광기, 그리고 그 안에서 명멸해가는 인물들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마고 로비, 브래드 피트, 디에고 칼바 등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와 제스틴 허위츠의 음악, 과감한 연출이 결합된 이 작품은 분명히 호불호가 갈리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본 리뷰에서는 바빌론의 배경이 된 할리우드의 변화, 영화 속 광기의 에너지,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초기 할리우드, 꿈과 붕괴의 공존

‘바빌론’은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당시 영화 산업의 격변기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기존 스타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잭 콘래드는 전형적인 무성영화 스타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점점 잊혀져간다. 그의 몰락은 과거의 영광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냉혹한 변화를 상징한다.

반면 마고 로비가 연기한 넬리 라로이는 무명에서 스타로 급부상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제력을 잃으며 추락한다. 그녀는 욕망의 결정체이자, 할리우드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은 취약함을 드러낸다. 한편, 디에고 칼바가 연기한 매니는 이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관찰자’이자 ‘참여자’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세계가 꿈을 먹고 자라는 공간임과 동시에, 그 꿈을 얼마나 잔인하게 삼켜버릴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바빌론'이라는 제목처럼, 이 세계는 웅장하고 혼란스럽고,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

광기와 혼란의 시청각 경험

‘바빌론’은 정제된 이야기보다는 감각의 과잉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오프닝부터 거대한 파티 장면은 광기의 정점이다. 마약, 성적 해방, 동물, 음악, 춤이 얽혀있는 이 장면은 단순한 서사적 기능을 넘어서 영화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이것은 혼란의 미학이자, 예술로 포장된 탈선을 상징한다.

감독은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빠른 카메라 워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주변 환경의 혼돈을 물 흐르듯 보여준다. 장면의 전환과 편집도 전통적인 문법을 따르지 않으며, 시공간을 압축하거나 확장하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에게 ‘내러티브’보다 ‘경험’을 하게 한다.

특히 인물들이 극단적 감정 상태에 도달하는 장면들 — 넬리의 광기 어린 연기, 잭의 체념 어린 눈빛, 매니의 절규 — 은 현실을 초월한 감정의 폭발을 그린다. 이 모든 장면은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감독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혼란과 광기는 단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예술이 태어난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음악, 감정의 리듬을 지배하다

‘바빌론’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음이 아니다. 그것은 장면을 이끄는 리듬이자, 감정을 조율하는 도구이며, 때로는 서사를 대신하는 주인공이다. 제스틴 허위츠의 음악은 재즈의 자유로운 박자와 즉흥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속에 구조적 긴장을 숨겨 놓는다. 이는 영화의 혼란과 에너지,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번역해낸다.

특히 넬리의 연기 장면이나 파티, 촬영 현장, 위기의 순간마다 흐르는 음악은 인물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한 곡이 수차례 반복되며 등장할 때, 그 음악은 단순한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라라랜드’나 ‘위플래쉬’에서 이미 보여준 데이미언 셔젤과 허위츠의 시그니처 스타일이기도 하다.

‘바빌론’에서 음악은 또한 캐릭터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장치로도 쓰인다. 밝고 경쾌한 음표가 결국은 몰락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를 만들고, 그 속에서 관객은 더욱 깊은 감정적 여운을 느낀다. 음악은 이 영화를 클래식하게 만들며, 때론 말보다 강한 울림을 남긴다.

 

‘바빌론’은 정제된 이야기나 교훈을 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의 광기, 창조의 고통, 영광과 몰락의 순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체험형 예술 영화’다. 혼란스럽고 길며, 불편할 수 있지만, 그 속엔 분명히 진심과 열정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예술을 위해 어디까지 미쳐본 적 있는가?” 바빌론은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며, 관객에게 말한다. “이 모든 광기 속에서도, 우리는 꿈을 꾸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