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色, 戒, Lust, Caution, 2007)’는 이안 감독의 대표작이자, 동양적 정서와 서사, 그리고 인간 내면의 욕망을 강렬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문제작이다. 일제강점기 하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여성 스파이와 친일 반역자 사이의 감정과 권력, 그리고 욕망의 파국적인 충돌을 담아낸 이 영화는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절제된 연기, 금기된 장면들, 그리고 이안 감독 특유의 깊은 시선은 단순한 에로틱 로맨스를 넘어선 정치적 멜로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이 리뷰에서는 영화가 그려낸 성과 권력의 관계, 두 주인공의 감정선, 그리고 금기의 미학에 대해 탐구해본다.
욕망
‘색, 계’는 단순히 남녀 간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성적 관계를 통해 권력, 정체성, 생존 본능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묘사한다. 탕웨이가 연기한 왕치아즈는 젊고 순수한 대학생이었으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친일파인 이선생(양조위)을 유혹해 암살하려는 작전에 가담한다. 그러나 육체적 접근이 반복되며 감정은 복잡하게 뒤엉키고, 그녀는 임무와 사랑 사이에서 점점 흔들린다.
이선생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나, 내면은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에 휩싸여 있다. 왕치아즈는 그런 이선생의 틈을 파고들지만, 그 역시 그녀에게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이 영화는 바로 이 ‘통제되지 않는 감정’과 ‘권력관계로 시작된 욕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지켜본다.
특히 두 인물의 베드신은 단순한 자극을 위한 장면이 아니다. 지배와 복종, 억압과 해방이라는 감정이 육체를 통해 드러나며,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이안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성행위’가 아닌, ‘심리적 전쟁’을 그린다. 관객은 이들의 관계가 사랑인지, 착각인지, 혹은 극한 상황에서 피어난 생존 본능인지를 끝까지 판단할 수 없다.
이안
이안 감독은 늘 억눌린 감정과 사회적 금기를 다뤄왔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동성애를 다뤘다면, ‘색, 계’에서는 성과 정치, 민족주의와 개인 감정이 충돌하는 지점을 파고든다. 이 영화는 수위 높은 장면들로 논란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안이 인물의 심리를 가장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 상하이. 겉으로는 번화하지만, 그 내부는 일본 점령 하에 불신과 배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안은 이러한 분위기를 시각적으로도 설계한다. 어두운 조명, 비좁은 실내, 정적이 흐르는 공간은 인물의 숨 막히는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왕치아즈의 의상 변화, 메이크업의 농도, 이선생의 방의 배치 등 디테일 하나하나가 상징적으로 기능하며, 영화 전체가 감정의 설계도처럼 느껴진다.
이안은 여성 캐릭터에게서 ‘피해자’ 혹은 ‘희생자’라는 도식을 벗어나게 한다. 왕치아즈는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스스로 선택하고, 그 안에서 사랑과 죄의식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그녀가 마지막에 내뱉는 “도망쳐요”라는 한 마디는 사랑의 고백인지, 동정인지, 스스로를 배반한 순간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더 슬프다.
금기 멜로
이 영화의 중심은 무엇보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심리 연기다. 특히 탕웨이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 배우로 떠오르지만, 동시에 중국 본토에선 출연 금지 처분까지 받으며 ‘예술과 금기’ 사이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의 연기는 단지 육체적인 표현을 넘어서, 감정의 결을 얼굴과 눈빛, 숨결에 담아내며, 영화 전체의 텐션을 유지한다.
양조위는 특유의 침묵 속의 불안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냉혹하고 계산적인 인물이면서도, 왕치아즈 앞에서는 미세한 떨림을 보이며, 감정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들의 대화는 짧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압축된 감정의 전류가 흐른다. 관객은 이들의 눈빛을 통해 사랑인지, 증오인지 모를 감정을 유추하게 된다.
또한 배경 음악, 소품, 조명 등 영화의 모든 요소가 배우들의 감정선을 따라 움직이며, 정서적 긴장감과 미장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색, 계’는 단순한 에로틱 멜로 영화가 아니다. 이안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랑과 임무, 감정과 이성, 성과 권력, 여성과 국가라는 복잡한 주제를 교차시키며 관객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왕치아즈가 마지막에 선택한 감정은 배신일까, 연민일까, 진짜 사랑일까. 그것은 누구도 명확히 답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는다. ‘색, 계’는 욕망의 뜨거움 속에서도 철저히 절제된 연출로, 인간 내면의 그늘과 불꽃을 동시에 비춘다. 이안 감독이 던진 이 묵직한 금기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감정의 거울이다.